경기도 일산 호수 공원 옆에는 현재 엄청난 규모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한류우드” 건설 현장인데, 미국의 할리우드를 모방해서 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욘사마 열풍으로 시작된 한류를 산업적 차원에서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촬영단지와 한류 관련 문화 관광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공사다.
한류우드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안 가기도 했지만, 할리우드를 모방해서 지은 이름임을 알고 난 후에는 씁쓸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를 비롯해 음식까지 한류라는 흐름을 타고 동남아 각 지역으로 번지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벌써 이에 대한 경계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하니, 국가 이미지를 홍보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한류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한류 현상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류를 지속시키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어떤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놓곤 한다. 얼른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문화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는 논리가 그리 앞뒤가 잘 맞아 보이지 않는다.
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현대 문화의 대표적인 장르인 영화 역시 그렇다. 대박을 겨냥한 영화치고 성공한 영화는 없었다. 영화를 문화와 관련해서 생각하면 이러한 현상은 사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달에 착륙한 이후 우주 관련 공상과학 영화는 미국 영화의 한 장르가 되었고,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이데올로기 투쟁이 주춤한 사이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 같은 신화에 기반을 둔 판타지물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가장 비근한 예만 들어도,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만들어 낸 문화적 환경은 바로 인터넷 문화이다.



영화는 카메라로 찍지만, 사상과 문화와 테크놀로지가 일체를 이루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는 전형적인 문화 콘텐츠다. 한 나라의 지식 기반 전체가 문화와 어울려 테크놀로지의 힘에 의지해 표출되는 것이 영화인 것이다. 한국에서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외국에서는 그렇지 못한 현상의 이면에는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남북문제, 조폭 문제 등이 한국 영화가 그나마 사상과 문화와 테크놀로지의 융합된 힘으로 파워를 행사할 수 있는 주제들이다. 영화와 같은 장르를 한류와 연결시켜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는 생각은 어설픈 생각임을 알 수 있다. 한류우드의 미래를 낙관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같은 산업은 어느 문화 장르보다 더욱더 영화가 아닌, 그러면서도 영화와 가장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인근 장르들과의 통합적 연구를 필요로 하는 장르이다. 연극을 비롯한 문학, 음악, 그리고 무엇보다 미술 같은 장르들은 영화의 발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분야들이다. 영화만 만들려고 해서는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가령, 개봉된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을 맡았던 <노팅힐> 같은 코믹 로맨스만 해도, 감독의 미술에 대한 상당한 안목이 작용함으로써 자칫 싸구려 영화로 떨어질 위험을 피해가고 있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마르크 샤갈의 몽환적인 그림 <결혼>이 등장해 헤어질 위기에 처한 주인공들을 재결합시키고 있다. 샤갈의 그림을 아는 이들은 두 연인이 결혼할 것임을 미리 알 수 있다.
<노팅힐>보다 조금 늦게 나온 영화이지만,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 같은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만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 영화에서 감독은 그러나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라는 그림 한 점을 영화 한복판에 걸어놓고 그 그림을 중심으로 영화가 움직이도록 하고 있다. 거창한 이데올로기도 없고, 공상과학 영화의 판타지도 없지만, 영화 <아멜리에>는 어느 화창한 여름날 오후, 센 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점심을 마친 한 무리의 남녀들을 그린 르누아르의 그림 한 점을 통해 시간과 역사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하고 있다.



주말의 명화 시간에 단골로 틀어주는 유명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또 어떤가. 3년 동안 미 전역을 뛰어다니면서 수십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던 아이큐 78의 포레스트 검프는 3년 동안 제자들을 거느린 채 히브리 광야를 돌아다녔던 지저스 크라이스트였다. 베드로가 어부였듯이, 다리 잘린 중대장 역시 어부였다. 예수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듯이, 영화에서도 포레스트 검프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비가 오는 어느 날, 흙탕길을 뛰어가던 포레스트 검프는 티셔츠 업자가 내민 티셔츠로 얼굴을 닦고 돌려준다. 티셔츠에는 스마일 마크가 찍힌다. 이 장면은 예수가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베로니카라는 이름의 여인이 내민 손수건에 얼굴을 닦고 돌려주자 수건에 예수의 얼굴이 찍혔다는 유명한 베로니카 전설을 그대로 패러디해서 영화에 이용한 것이다. 서양화에 <베로니카> 화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타이타닉>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 역시 아무 이유 없이 한국에서만 6백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극화하면서 카메론 감독은 가난한 젊은 화가라는 가공의 캐릭터를 영화에 삽입했다. 디카프리오가 역을 맡은 이 젊은 화가는 여주인공 로즈의 누드를 그린다. 목탄으로 그린 이 누드는 80여 년 동안 바닷물 속에 있었지만 물 한 번 뿌리자 옛 모습 그대로 살아난다. 동시에 영화는 이 그림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된다. 많은 이들은 잭이 그린 로즈의 누드가 감독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의해 영화에 삽입된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아니다. 완전히 옷을 벗고 누운 로즈의 누드는 이른바 리클라이닝 누드라고 해서 ‘누워 있는 누드’화인데 서구 회화사에서는 티치아노 이후 고야를 거쳐 모딜리아니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이후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렸던 상당히 중요한 장르였다. 카메론 감독은 서구 누드화의 한 장르를 영화에 이용한 것뿐이다. 뿐만 아니라 <타이타닉>의 타이틀 이미지인 두 남녀가 뱃머리에서 바람을 맞으며 포옹하는 장면 역시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흔히 나이키로 불리는 <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상의 이미지를 패러디한 것이다. <타이타닉>에서 로즈의 누드를 그린 장본인은 디카프리오가 아니라 실제로는 감독 카메론이었다. 놀라운 데생 실력을 갖춘 감독은 미술을 얄미울 정도로 적절히 영화에 활용한 것이다. 한국에서만 6백만 명 이상을 끌어들인 <타이타닉> 영화의 매력은 상당 부분 감독의 미술에 대한 식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화가의 일생을 다룬다고 해서 미술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이미 한 장의 사진이거나 한 폭의 그림이다. 아니 그 이전에, 영화는 회화나 음악 그리고 문학 작품과 함께 예술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 영화는 관객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마련이다. 관객들은 단순히 웃고 즐기려고 영화 앞에 앉아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감동이다. 감동은, 사상과 문화와 테크놀로지가 어우러질 때만 가능하다. 한류우드의 앞날에 대해 악담을 할 생각은 없지만, 한낱 관광 상품이나 파는 쇼핑 거리나 먹자골목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류우드가 아닌 다른 발상이 필요할 것이다


글_정장진(문화평론가, 고려대 강사) 사진_김병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