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은 왜 <시간>의 개봉에 회의적인가?
현재 김기덕 감독은 언론과의 접촉을 일체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그가 <시간>의 국내 극장 개봉을 거부하는 이유를 직접 들어볼 수도 없다. 제작사측에서도 김기덕 감독의 심경을 추측하기조차 버거워하고 있다. 분명하게 전해진 것은 현재의 국내 배급시스템으로는 김기덕 감독의 신작 <시간>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원칙뿐이다. 국제영화제를 통해 만나거나, 해외에서 역수입을 해서 외국영화 취급으로 개봉하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와 함께.

김기덕 감독이 <시간>의 국내개봉을 거부하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는 더 이상은 적자를 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보인다. 그의 13번째 영화인 <시간>이 국내 개봉 시 적자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지난 12번의 손해로 충분히 검증된 계산인 모양이다. 저 예산의 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독보적으로 개척한 김기덕 감독이지만 국내 관객들의 철저한 외면을 이겨낼 유일한 방안으로 ‘개봉 안 하는 것’이라는 딜레마에 빠진 것은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다. 김기덕 감독은 12번째 작품인 <활>의 개봉에 앞서 “11번째 작품 <빈집>까지 수억 원의 마케팅 비용을 태우고 대규모 개봉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고 말 한바 있다. 그래서 일체의 시사회 없이 <활>의 단관 장기 개봉을 추진했지만, 결코 독립 예술 영화가 성공할 수 없는 (절망적인)한국 배급 시스템을 다시 한번 확인한 계기가 됐을 뿐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대체 김기덕의 영화들이 얼마나 홀대 받았길래 그런 걸까? 흥행성적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기덕 감독의 흥행 성적은 다음과 같다. <파란대문>(98) 5,827명, <악어>(96) 3,284명, <야생동물 보호구역>(97) 5,413명, <섬>(00) 32,137명, <실제상황>(00) 2,285명, <수취인 불명>(01) 9,855명, <나쁜 남자>(02) 298,926명, <해안선>(02) 123,633명,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03) 30,000명, <사마리아>(04) 62,016명, <빈집>(04) 34,317명, <활>(05) 1,226명. (이상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서울 관객 기준) 싸구려 코미디 영화로 만들어놓고 각종 TV오락 프로그램에 주연 배우들이 등장해서 웃기는 말만 떠들어도 수백만의 관객이 몰리는 작금의 현실에서 지나치리만큼 외면 받아 온 김기덕 감독. 그나마 그의 최고 히트작이었던 <나쁜 남자>는 여성단체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았는가 하면 <친구>로 800만 관객을 동원한 장동건이 출연했음에도 <해안선>은 12만 3천명 밖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마케팅 전쟁에서 소외되어 있다 해도, 이쯤 되면 ‘김기덕’이라는 이름이 걸리는 순간 관객의 외면을 사고 있다는 의심도 생긴다. 그도 사람인데 자식 같은 영화들을 이런 세상에 무방비로 내놓기 싫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 해외에서는 적지 않은 흥행 성적을 낸다는 점이다. 2004년 북미지역에서 개봉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380만 달러의 수익을 냈고 전세계적으로는 952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신작인 <시간> 역시 베를린 필름 마켓을 통해 30개국의 수출을 성사시켜놓은 작품이다. 30개국이라면 웬만큼 영화 보는 나라라면 거의 다 들어간 셈인데, 정작 한국만 쏙 빠져있다. 한국에서는 개봉 없이 공중파와 케이블을 통해 곧바로 선보일 계획을 세우고 있단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 과연 김기덕이라는 영화 감독과 <시간>이라는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할 가치가 없는 존재일까?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인 바람으로만 김기덕과 <시간>의 귀환을 바란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많은 영화인들이 스크린 쿼터 논란을 통해 주야장천 외치고 있는 ‘문화 다양성’의 측면에서라면 <시간>이 개봉해야 할 당위성은 명백해진다.

김기덕의 멈추지 않는 시간의 약속 <시간>
<시간>에 출연한 배우는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하정우와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성현아다. <시간>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것은 그것이 전부다. 스틸 사진 한장 공개된 것이 없다. 거의 유일하게 <시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글(씨네21 549호) ‘반복 안에서 찾은 새로움, 김기덕 감독의 신작 <시간>’에 따르면 <시간>은 충분히 훌륭한 영화적 가치를 가진 작품임을 추측할 수 있다. 정성일의 글 탓인지 <시간>의 힘 탓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심하게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무뎌지기 마련인 연애 감정을 새롭게 하기 위해 성형수술을 감행한 여인과 그의 남자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시간>은 그 내용적 시간성뿐 아니라, 형식적 시간성 또한 영화 속에서 재창조되고 있는 듯 하다. “(생략) 그는 여전히 보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고, 보는 내내 감각을 긴장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위험할 정도로 자기 영화를 한쪽의 경계까지 몰고 간 다음 재빨리 그걸 반대 방향으로 끌고 와서 그 한계까지 밀고 간다. 그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혹시나 <빈 집>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던 <활>의 매너리즘을 간단하게 바다에 던져버린 다음 여기서 다시 시작하고 있다. 이제는 김기덕의 열네 번째 영화를 기다려야 할 시간이다. 정말, 정말 이 사람은 점점 더 궁금해진다”고 정성일은 말하고 있다.

김기덕의 작품을 두고 일반 관객이 가지고 있는 편견들이 순전히 편견으로 보이는 이유는 13편이나 만들어낸 김기덕의 영화 중 일부, 그 중에서도 <섬>과 <나쁜 남자>만을 두고 생겨난 평가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의 흥행 성적이 말해주고 있듯, 그 이외의 영화를 본 사람이 별로 없지 않은가? 지금 이 자리에서 아니라고 김기덕의 영화는 정말 재미있다고 아무리 우겨본들 <시간>이 개봉하고 수십 수백만의 관객을 불러모으는데 큰 힘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성일의 ‘<시간>을 보았고, 이 영화가 훌륭하기 때문에’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시간>을 보고 싶고, 이 영화가 훌륭한지 판단하고 싶기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미 <활>을 통해 좌절을 경험한 듯 보이면서도, 또다시 새로운 소재와 화두를 건드리며 멈추지 않고 <시간>을 만들어낸 김기덕 감독이기에 <시간>을 둘러싼 작금의 사안들을 개인의 고집이나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넘겨버려선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에 공감하는, 즉 김기덕의 <시간>을 열렬히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수십 수백만은 아니더라도 수백 수천은 될 것임이 분명하다.

현재 국내에서 스크린으로 <시간>을 만나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KT&G와 씨네21이 공동 주최한 일반 시사회 한번뿐이다. 필자도 오랜만에 시사회 이벤트에 응모하고 두근두근 당첨을 기다렸으나, 신청자가 너무 많았는지 당첨되지 않았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망연자실의 상태에 빠져버렸다. 궁금하다면 씨네21의 홈페이지에 한번 들어가보시라. 이벤트 게시판에 당첨되지 않은 사람들이 올린 ‘<시간>의 시사회 표 구한다’는 글이 수없이 올라와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자 불만이 생겨난다. 김기덕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개봉하면서 손해를 봐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그의 영화를 기다리는 수백 수천의 관객들이 안타까움에 애만 태우고 있어야 할 이유 또한 전혀 없다는 점이다. 조금 더 격앙되게 말하자면 김기덕 감독은 ‘삐친’ 마음을 가다듬고 그의 영화를 원하는 국내 팬들에게도 소박하게나마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철저하게 상업논리로 굳어버린 국내 배급시장의 회유를 기대하는 것도 무모해 보인다. 많은 영화인들이 사활을 걸다시피 외쳤던 스크린 쿼터 제도 또한 김기덕의 영화 같은, 어쩔 수 없이 소수가 된 영화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행여나 또 한번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망한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개봉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국내 극장 개봉에 등을 돌린 김기덕을 다시 돌려세워야 한다. 정부가 나선다고 될까? 언론이 나선다고 될까? 김기덕 전용관이라도 세우면 될까? <시간>이 개봉하면 꼭 보겠다는 서명이라도 해서 수십만의 관객을 미리 확보한다고 될 일 일까? 불가능하다고? 구체적인 해결책은 복잡하겠으나, 해답의 초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김기덕 감독이 ‘국내 극장 개봉’에 긍정적인 의사를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리라 믿는다. 김기덕은 7전 8기가 아니라 12전 13기를 강요해서라도 꼭 곁에 두고 싶은, 곁에 둘 가치가 있는 감독이다.

입력시간 : 2006-05-25 11:31
손창욱 기자 (ikeike@ticket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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