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프로듀서 박진영의 인터뷰를 봤다. 가수 비라는 ‘상품’이 미국에서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전략은 최대한 아시아적인 특색과 가수 비만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미국 사람들이 느끼기에 거북할 정도의 이질감은 주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질감을 주지 않으려고 그들을 너무 따라 한 모습도 보였지만) 비의 공연을 보러 온 6,000여 명의 노랑머리의 미국인들을 단지 색다름을 찾는 적극적인 얼리 어답터에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의 친근한 모습에 반해 지속적으로 비에게 열광할 수 있는 팬으로 만들 수 있게 하려는 계획이다. 프로듀서 박진영은 비가 반짝 가수로 남을 수도 있을 거라는 캐즘(chasm)을 미리 예견하고 이런 전략을 짰는지도.

캐즘(chasm)이란 원래 지층 사이에 큰 틈이 생겨 서로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지질학 용어다. 이것을 미국 실리콘밸리의 컨설턴트 조프리 무어(Geoffrey A. Moore)가 벤처 업계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면서 제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일반인들이 널리 사용하기까지 넘어야 하는 침체기가 있다는 적절한 이용으로 차용하면서 마케팅 이론으로 확립되었다.
캐즘 이론에서는 소비자를 크게 혁신적인 제품이 나오자마자 스스로 실험대상이 되기를 자청하는 ‘혁신자’, 혁신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상품의 실용성을 전망하면서 소비하는 ‘선각수용자’, 충분히 사용할만하다고 느껴지는 시점에서 경제적으로 소비하는 ‘전기다수’, 지금 가지고 있는 상품에 불편을 느껴서야 새로운 것을 구매하는 ‘후기다수’, 마케팅을 어떻게 하건 간에 상관을 하지 않는 요지부동의 ‘지각수용자’ 등의 5개 계층으로 나누고 있다.

캐즘 이론의 창시자인 조프리 무어에 따르면 기업에 가장 중요한 계층은 전체 소비자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전기다수로 이들이 상품을 구입해 줘야 기업의 수익성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각수용자층에서 전기다수로 넘어가는 과정에 깊고 큰 단절(캐즘)이 존재한다. 대다수 기업이 전체 소비자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혁신자와 선각수용자층을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하지만 전기다수를 확보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내며 쓰러진다고 한다.

1997년 12월 엠피맨닷컴이 처음으로 MP3 플레이어를 시장에 내 놓았다. MP3 플레이어는 혁신적인 물건이었다. 하지만 혁신적인 시작과 다르게 몇 년 동안 생사가 불투명한 캐즘이라는 협곡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탄생 후 여섯 해가 지나서야 수 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도입기를 지나 도약기를 거쳤다. 캐즘이란 ‘초기시장의 흥분이 가라앉고 주류시장은 불완전한 솔루션으로 아직 일궈지지 않은 절망의 시기’라고 한다. 상품이 나오기가 무섭게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면 절망이 더 어두울 것이다. 빛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두움은 지옥과도 같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어둡다고 눈을 감아버리면 평생 앞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캐즘이라는 협곡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캐즘을 벗어나는 관건은 불완전한 솔루션을 절망 속에서도 완전한 솔루션으로 개혁할 수 있는 인내와 저력의 유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