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책이 머리 속에 쏙 쏙 들어오지 않습니다. 기억력이 감퇴하거나 잡념이 많아서일겁니다. 다 읽고 책장을 넘겼는데 앞장이 생각나지 않으니…. 또 한가지는 분명히 읽은 책인데도 그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억울한지요? 밤새워 책을 읽고 새벽을 맞을 때의 그 벅찬 감동은 어디로 흘러가 버렸는지….

작품 속의 수많은 주인공도 이제 기억 속에는 몇 명 남아있지 않습니다. 특히 세계문학전집 속의 외국이름들은 거의 지워졌습니다. 러시아나 동유럽쪽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얼마나 길고 생소했습니까. 그래도 젊은 날 우리는 그 이름들을 잘도 외웠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습니다.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계속 책을 읽어야 하는가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이 만든다"는 경구는 유효한가요? 파트리크 쥐스킨트도 에세이 `문학적 건망증"에서 책읽기의 허망함을 통탄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 건망증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축복이며 거의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다소 위안이 됩니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맞습니다. 독서를 하면 책 속에서 얻은 울림이나 깨달음이 의식 깊숙한 곳에 저장이 됩니다. 책 속에서 얻은 것들은 차곡차곡 층을 이루어 쌓여있고, 흡사 빗물을 맑은 샘물로 걸러주는 지층처럼 우리 생각을 걸러준답니다. 우리는 분명 줄거리를 습득하고 이름을 외우려고 독서를 하지는 않습니다. 책 속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진실이나 지식이 담겨있듯이 그걸 저장하는 내면의 창고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 있을 것입니다. 강박관념을 버리고 즐겁게 읽읍시다. 읽은 책은 다시 태어난답니다. 우리도 모르게 의식 깊은 곳에서.

〈김택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