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감독은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배운 게 있다면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교적 우호적인 환경에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자부하는 장항준 감독은 2년 내내 하나의 시나리오를 14번 고치는 데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그가 깨달은 것은 펜은 칼보다는 강할지 몰라도, 메가폰보다는 약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펜을 버리고 메가폰을 들었다. 지금 충무로는 시나리오 작가 출신 감독들도 넘쳐난다. 멀게는 <바람의 전설>의 박정우 감독, 가깝게는 <알포인트>의 공수창 감독과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다. 김해곤 작가는 <보고 싶은 얼굴>로, 이해영, 이해준 작가는 <천하장사 마돈나>로 디렉터스 체어에 앉았다. <위대한 유산>을 쓴 이원형, 이원재 형제 작가 역시 각각 서로 다른 프로젝트로 감독 입봉을 준비 중이다.

제작자들은 충무로에 시나리오 작가가 없다고 통탄한다. 그러나 이 말은 충무로에 평생 이 직업을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시나리오 작가가 없다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장항준 감독은 “감독 입봉을 위한 전단계가 아닌, 전업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사람은 드물다”라고 충무로의 현실을 전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모든 건 원고지 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했다. 충무로에 비슷한 기획 영화들이 양산되고 있는 흐름은, 원고지로부터 시작됐다. 정확히 말하면, 시나리오 각색 과정의 문제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최근 공포 영화를 쓴 한 작가는 잔혹한 장면들을 모두 잘라내야 했다. 제작사에서 15세 관람가를 맞춰야 한다고 요구해서다. 코미디 영화를 쓴 한 작가는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꿔야 했다. 해피엔딩이 아니면 찜찜해하는 제작사의 태도 때문이다. 작가들은 시나리오를 억지로 코미디화하려고 하는 제작사나 투자사의 태도가 가장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김해곤 감독은 “휴먼 코미디라는 충무로의 장르는 70~80%가 사기다”라고 말했다. 그런 흥행 장치로 인해, 시나리오는 하향 평준화를 달린다는 것이다.

제작사들이 보기에 시나리오를 수정해야만 하는 이유는 백 가지도 더 넘는다. 초고가 완벽하지 않은 이상 시나리오가 크랭크인 전까지 수정되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종종 터무니없는 요구로 시나리오의 전체 줄기가 흔들린다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고, 핑계 없는 각색 없다. 그들은 핑계를 댈 때 주로 배우의 이름을 빌린다. 스타급 배우가 캐스팅됐지만 그가 맡은 역할이 너무 작은 경우 비중을 늘려달라고 요구하는 건 충무로의 관행이다. 여배우가 노출신이나 욕지거리 대사를 싫어해서 바꾸는 경우 등 캐스팅을 위해 시나리오는 매번 다른 옷을 입는다. 30대 노처녀의 애환을 다룬 영화에 젊은 여배우가 캐스팅되면서 영화가 20대 여성의 싱글 라이프를 다루는 내용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남자 주인공을 캐스팅하기 유리하다는 이유로 형사 영화가 쏟아지는 것만 봐도 시나리오가 캐스팅을 위해 어떻게 복무하는지 알 수 있다.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보통명사 ‘관객’ 역시, 제작사에서 인용하기 매우 편리한 권력자다. 물론 잠재 관객인 당신은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당신이 지금까지 영화 관람을 하는 데 있어 보인 행동 패턴이다. “관객이 말이야, 이런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시나리오 작가는 “안정적인 패턴 위주로 시나리오를 고치기 때문에 결국 시나리오의 원래 매력은 사라지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획일화된 기획 영화만 나오는 것이다”라고 의견을 표했다. 영화 <2424>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등이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당선된 기발한 시나리오로 불렸다는 사실만 봐도, 위 사실은 자명하다. 그리고 영화 개봉 후 배우들은 똑같이 말한다. “책(시나리오)이랑 너무 달랐어요.”

여기까지 들은 참을성 없는 독자들은 “그럼 법대로 해라”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들이 법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제작사가 만족하는 수준까지 시나리오를 집필한다”와 같은 모호한 계약 조항에 발이 묶여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제작사에서 작가들에게 각본료를 지불하는 방식 역시 ‘책임 완수제’에 기초하고 있다. 초고를 넘겼을 때 전체 각본료의 절반을 받고, 영화 제작이 확정된 상황에서 완고가 나올 시 그 나머지 절반을 지급 받는 형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개월이 걸리든, 몇 년이 걸리든, 제작사가 원하는 기준의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그들이 받는 각본료는 동일하다. 운이 좋으면 6, 7고 만에 시나리오를 터는 경우도 있고, 최악의 경우 몇 년 동안 50고를 쓰는 작가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나마 고생을 하더라도 영화가 제작되면 다행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 투자 상황이나 캐스팅이 여의치 않아 영화가 엎어지면,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경력은 증발된다. 김해곤 감독은 한 때 ‘잔금포기’라고 불렸다. 초고를 넘길 때 전체 각본료의 60~70%를 받고, 본인이 생각하는 영화 방향과 제작사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으면 잔금을 포기하더라도 아예 중도 하차해 붙은 별명이다. 악질 영화사는 영화 개봉 후 잔금을 주는 지불 방식을 작가와 체결하기도 하는데, 이런 악습은 많이 사라진 편이다.

무엇보다 충무로 시나리오 각색 과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의 시나리오를 여러 작가에게 돌리는 고질적인 관행이다. 작가들의 계약서에는, 제작사는 계약하는 작가 외에 다른 작가를 고용하여 시나리오를 수정, 기타 변경할 권한을 가진다고 나와 있다. 일부 제작사는 작가가 제작사나 감독과 이견 차이가 심할 경우 작가를 몰래 바꿔버리기도 한다. 한 시나리오 작가는 배우들이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으로 수정한 가짜 시나리오 책을 제작사에서 만들어 배우들에게 돌리는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혈의 누>를 쓴 이원재 작가는, <여선생 vs 여제자> 시나리오를 쓸 당시 다른 각색자에게 시나리오를 넘겨줄뻔 했다. 여자 캐릭터를 제대로 살린다는 이유로 제작사에서 유명 여자 시나리오 작가에게 각색을 맡겼지만 결국 그 내용이 기존의 시나리오 틀거리와 너무 달랐던 탓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우 감독은 “시나리오는 결국 마지막에 수정한 사람의 작품이다”라고 지적한다. 제작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는 여러 작가에게 시나리오를 맡기면 그들의 장점만 집대성한 좋은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다는 착각이다. 표준화된 흥행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려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원재 작가는 “단점 위주로 시나리오를 수정하려는 관행이 문제다. 장점을 더 살리기보다는 단점만 보고 그것을 자꾸 보완하려 하다 보니까 시나리오가 획일화되는 것이다”라고 뼈있는 말을 했다. 특히, 감독이 아직 내정되어 있지 않은 시나리오의 경우,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수많은 작가들의 손을 거친다. 영화를 찍어봤다는 이유로 연출부 스태프가 시나리오에 관여하는 일도 심심찮게 있다. 한 작가는 “나중엔 내가 고친 게 뭔지도, 원안이 뭐였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고 말했다. 공수창 감독은 “크레딧에 나오는 이름 뒤에 몇 명이 이 시나리오를 만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크레딧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영화의 부가 판권은 물론이고 시나리오의 출판 저작권을 제작사가 가지고 있는 독소조항에 대해서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과 기본 뼈대를 만든 사람과 각색한 사람 중 과연 누구에게 판권이 있느냐를 고민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 <이터널 선샤인>의 시나리오를 쓴 찰리 카우프만처럼 충무로에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독특한 작가가 없는 것은, 작가들의 노력 부족이라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 한 작가는 “요즘엔 습작도 거치지 않으려고 하고, 무조건 제작사 입맛에 맞춰 데뷔부터 하고 보겠다는 작가들도 상당수다”라고 지적했다. 시나리오가 영화화돼서 일정 정도의 흥행을 보장할 경우, 각본료가 2배 이상 올라가기 때문이다. 제작사의 요구에 맞춰 작품을 각색하면서 점점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나 대사는 줄어들고 기획 영화를 만들어내는 평범한 시나리오 작가들만 양산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작가는 “계약서에 작업 기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못하는 것은 작가들의 문제기도 하다. 본인이 그 정해진 기간 안에 일정 정도의 작업물을 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충무로의 관행을 알고서도 서로 묵인하는 것이다”라는 다른 시각을 내놓기도 했다.

시나리오를 제대로 쓰는 사람도 없지만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도 드물다는 게 충무로의 빈약한 현실이다. 한 작가는 “어떤 영화사 직원은 시나리오의 3분의 2를 읽으면서도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더라”라고 황당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런 녹록치 않은 상황 덕분에 충무로의 시나리오 작가들은 오늘도 원고지 위에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문득 찰리 카우프만이 되기를 포기하고 평범한 감독이 되는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에디터 | 나지언
GQ.com